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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마음의 발견12>“선생님, 이렇게까지 저를 부끄럽게 하십니까.”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기사입력 2024/10/11 [03:06]

<칼럼/마음의 발견12>“선생님, 이렇게까지 저를 부끄럽게 하십니까.”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입력 : 2024/10/11 [03:06]

지난 오월, 산문집 한 권을 제가 내었습니다. 산문집의 제목은 <짐작>입니다. 이 책에 실린 36편의 글 중에 한 편이 ‘짐작’이라는 글인데, 그걸로 이 책 전체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짐작(斟酌)’은 ‘상대방의 잔에 맞추어 술을 따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상대의 형편과 마음을 헤아려 따라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사귐과 소통의 아름다운 경지들을 우리의 구체적 삶과 마음에서 찾아보려는 뜻을 담은 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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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작가가 아닌 다음에는 저자의 첫 번째 인세는 돈으로 받지 못하고 책으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세 대신 받은 책은 금방 동이 납니다. 그 뒤로는 저자도 자신의 책을 출판사에서 직접 사 옵니다. 그런데 책을 출판하고 나면 갈수록 책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소록소록 줄을 이어 떠오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 정든 이들에게 저자 서명을 하고, 그 책을 우송하려고 매일 아침 동네 우체국에 가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래 격조했던 지인들에게 책으로 안부를 전하는 일은 행복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두어 달 계속됩니다.

 

그날은 저의 산문집 <짐작>을 연이 닿는 제자들에게 우편 소포로 보내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1974년부터 2017년까지, 중간에 한국교육개발원에 근무한 11년을 빼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선생을 했으니, 32년에 걸쳐 제자들과의 인연이 생겨난 셈입니다.

 

그중에는 박나경(가명)이도 있습니다. 그녀는 1977년 서울 약수동 장충여중 3학년 때 내가 담임을 했던 제자입니다.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지만 꿈과 포부로 자아와 소망을 일깨워 가던 열다섯 소녀, 출석 번호 52번 나경이를 기억합니다. 그 홍안의 소녀들도 이제는 환갑 진갑 다 지낸 나이들이 되었습니다. 나경 제자는 집이 어려워 인문계 고교를 가지 못하고 실업계 고교에 갔습니다. 그녀는 뒤에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었을까요.

 

그 이후 오래 연락 닿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지내다가, 약 10여 년 전에 우연히 제가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 방송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나경 제자는 TV로 저를 보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다시 발견하고, 인사 메시지를 보내오고, 해 바뀌면 계절 안부를 정성스레 전해오는 제자입니다.

 

그러고만 지내다가 지난해 겨울이던가 지하철 교대역 부근에서 나경 제자를 그야말로 근 50년 만에 만났습니다. 착하고 근면한 그녀의 남편도 함께 만났습니다. 나경 제자가 중학교 졸업한 이후 처음입니다. 나경 제자는 지금도 살림이 여유롭지 못합니다. 부부가 함께 일터로 출근하여 종일 일하고 함께 퇴근하는 일과라고 합니다.

 

나경 제자는 말합니다. 그녀는 나에게서 내 책을 선물 받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책을 보낸 일이 많지도 않습니다. 이번까지 세 번이 안 될 겁니다. 나경 제자가 내 산문집 <짐작>을 받은 날, 그녀는 카톡으로 감사 문자를 진정 넘치게 내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러고 몇 시간 후 나경 제자는 이런 메시지를 보냅니다.

“선생님, 책을 출판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다 보내면 어찌합니까. 다른 제자들께 보낼 것을 제가 조금만 보탤게요.”

그러고는 카카오페이로 책 15권을 살 수 있는 돈을 보냈습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워서 바로 답을 보냈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제자들에게 책 보내는 일은 내가 응당 할 일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경 제자가 보낸 책값을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나의 메시지를 받은 나경 제자의 마지막 답 문자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선생님, 이렇게까지 저를 부끄럽게 하십니까!”

 

나는 마음이 좀 복잡해졌습니다.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나경 제자의 후의(厚意)로 책을 받아 볼 15명의 옛 제자들의 이름을 적어 보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나경 제자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럭저럭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나경아, 내가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수 있겠느냐. 편한 마음으로 잘 자기를 바란다.”

이것이 올 스승의 날 즈음에 제게 일어난 일입니다.

 

나경 제자, 그녀의 마음에서 그 어떤 선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옛날의 귀한 인연을 받들어 내 마음을 그렇듯 선하게 보내드린 적이 있는가? 글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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