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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포커스TV

<칼럼/마음의 발견14> 이별의 기술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기사입력 2024/11/11 [23:06]

<칼럼/마음의 발견14> 이별의 기술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입력 : 2024/11/11 [23:06]

김 교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이야기다. 오래될수록 내게는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이야기이다. 김 교수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음악교육을 전공한 그녀는 영민하기도 하였지만 곱기도 하였다. 맑은 품성에 인간미 또한 소박하고 친근하여 나를 포함한 동료 교수들 모두가 그녀를 좋게 느꼈다.

 

▲     ©박인기 교수

 

30대 후반인 그녀는 작고 가녀린 풍모였지만, 소중하다고 판단하는 일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으로 몰두하여 주변을 놀라게도 하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담소하는 자리에는 그녀로 인해서 따스함이 묻어났다. 늘 나중에 알게 되는 그녀의 속뜻에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암이란 몹쓸 병이 왔다. 이 어렵고도 부조리한 삶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고 개탄하고 어이없어했다. 그 분노와 개탄의 뜻이 하늘에 상달된 탓일까. 그녀는 일 년 가까운 기간을 잘 투병하고 새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우리는 갈채를 보냈다. 그녀와 다시 함께 보낼 수 있게 된 시간에 대해서, 그리고 여전한 감동을 주는 그녀에게서 축복과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전했다.

 

그러기를 잠시, 그해 가을 그녀에게 그 병이 재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누구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짙은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눌렀다. 정작 본인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했을까. 병상의 그녀에게 다가가는 일은 쉽게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녀의 고통과 절망의 구체적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마음에서 상상으로 그녀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슬프고 두려웠다.

 

그녀의 병이 깊어갈수록, 우리의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들수록, 그녀를 떠올리는 것이 아프고 두려웠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켜 서 있고 싶은 마음이리라. 무어라 할 말이 하나도 없는 정황! 죽음이 아닌 다른 이별이면 좀 나을까. 아니 오히려 죽음이 갈라놓는 이별이므로, 무슨 말이든 다가가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별을 대하는 것은 이렇게 맥없이 애매하고 모호했다.

 

이듬해 늦은 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 유가족 자리에는 그녀의 어린 딸아이가 있었다. 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눈망울을 아래로 내리고 슬프게 앉아 있었다. 딸아이는 엄마만큼 귀엽고 반듯했다. 그 어린 상주가 사람들의 슬픔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저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었을까. 이 장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엄마인 그녀가 감당했을 슬픔은 어떠했을까. 이 이별을 그녀는 수백 번도 더 예감하고 떠올렸을 것 아니겠는가.

 

김교수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장례를 다 마친 후 인사차 학교를 방문한 유가족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오래도록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그녀는 죽음을 예감하는 절망의 병상에서 여러 수십 통의 편지를 딸에게 봉함 편지로 남겼단다. 어떤 편지는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읽도록 준비했고, 어떤 편지는 딸아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읽도록 했고, 어떤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읽도록 했다.

아기를 낳았을 때 읽도록 준비한 편지도 있었단다. 그런가 하면, 딸이 외로울 때를 위해 읽도록 남긴 편지도 있었고, 혹시나 병고에 시달릴 때를 위해 남긴 편지도 있었단다.

 

그렇듯 슬픈 이별을 이토록 아름다운 감동으로 승화시키다니, 참으로 그녀가 위대해 보였다. 슬픔의 힘으로 단단하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빚어내는 이 아득히 높고 빛나는 정신의 작용 때문에 사람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나는 다시 했다.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을 쏟아 놓게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깨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을 희망으로 이끌어 올리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때까지 그냥 추상적 관념으로만 되뇌고 있던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한 구절이 아주 또렷한 구상으로 확인되어 내 가슴 안에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이 대목이 김교수의 마음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물론 만해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한 순전히 내 일방의 해석이며 적용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 일과 더불어 이 시의 해석이 내 안으로 구체적으로 다가와 뚜렷한 심상(心象)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였다. 다음의 대목은 그녀의 딸아이를 비롯하여 남아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 호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김 교수가 떠나간 지도 오래되었다. 예쁜 여섯 살 딸도 이제는 서른을 넘은 여인으로 성장해 있겠다. 영원한 이별의 길을 떠난 엄마로부터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수십 통 편지로 받으면서 자라가는 그녀의 딸에게는 더욱 또렷한 다짐으로 이렇게 마음에 살아 있을 것이다.

“엄마는 가셨지만 저는 엄마를 보내지 않았어요.”

 

보내고 헤어지는 모습은 사람의 성숙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헤어짐에는 깊은 배려와 강한 절제가 지혜로 스며들어야 한다. 우리는 헤어지는 데에 얼마나 지혜를 발휘하는가. ‘지혜’라는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면, 조금은 가볍게 ‘이별의 기술’이라고 명명해 볼까.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이별은 너의 고통일 뿐 나에게는 불가피한 사정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새 애인이 생기면 옛날 애인을 큰 탈 없이 떨쳐내어 버리는 정도를 ‘이별의 기술’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연애를 ‘작업의 기술’로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이별의 기술 또한 ‘천박한 기교’로 전락하리라.

진정한 이별의 기술이란 무엇이겠는가. 이별도 일상 겪는 범상한 일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나에게 성실하고, 여전히 상대에게 배려하고, 여전히 내가 지어 온 관계들에 감사하며, 그렇게 이별을 할 일이다. 김 교수가 했던 일, 그것이 이별의 기술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쉬운 말임에도, 실제로 당하여 행하기에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 박인기 저 <언어적 인간, 인간적 언어>(푸른사상) 중에서,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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