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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의 발견> 엄 선생의 고향 생각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기사입력 2024/07/03 [05:16]

<칼럼/ 마음의 발견> 엄 선생의 고향 생각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뉴 포커스TV | 입력 : 2024/07/03 [05:16]

2012년 7월, 나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며 활약한 독립유공자 양세봉 장군의 기념비를 찾아갔었다. 그의 외손인 심양민족사범고등전문학교의 김춘련(金春蓮중)교수가 동행했는데, 양세봉 장군의 기념비가 있는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抚顺市) 신빈만주족자치현(新宾满族自治县) 왕청문조선족진(旺清门朝鲜族镇)은 벽지 산골 마을이었다.

 

나는 이 오지에서 몇 번이고 길을 놓쳤다. 그럴 때마다 마을에 들어가 길을 물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동포 후손들을 만났는데, 잠시 잠깐이지만 여러 감회가 일었다. 저 동포들은 그 옛날 조상들의 고향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다 무슨 운명의 사연으로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날은 기울고,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그 길 위에서 나도 모르게 백년설의 노래 ‘나그네 설움(1942년 작)’이 터져 나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렇게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이다. 만주로 흘러 들어간 식민지 백성의 서글픈 유랑 정서가 왈칵 다가온다. 그들이 수도 없이 고향을 그려 울면서 불렀을 이 노래의 실제가 내 가슴으로 안겨 왔다. 눈물이 났다. 고향을 생각한다는 일의 절절함을 이렇듯 강렬한 실존의 심정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고향 생각은 언제 간절한가. 고향 밖에 있을 때 간절하다. 고향에 사는 사람에게 고향은 그냥 그렇고 그런 무던한 현실이다. 조상 때부터 생계를 일구어 가는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니 특별한 그리움이 사무칠 여지가 없다. 오히려 고향 밖이 쳐다보인다. ‘고향(故鄕)’이란 말의 ‘고(故)’에는 ‘옛날에 살았던(지금은 떠나와 있는)’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더구나 돌아갈 기약이 아득해진 고향을 만리타향에서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머금게 한다.

 

내 고향 김천이 낳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조 시인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 선생의 고향 노래들도 선생이 고향을 떠나 타관의 자리에서 품는 고향 생각이다. 선생이 만년에 쓴 작품 ‘고향 생각’의 끝 연은 이러하다.

“빙그레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 구름 밖에 저문다.”

백수 선생의 연시조 ‘고향 생각’에 내걸리는 고향도, 당신이 고향 밖에서 숙명처럼 바라보는 고향이다. 더구나 죽어서 돌아가 묻힐 고향을 떠올리는 노시인의 마음속 고향은 살아온 생에 대한 모든 외경(畏敬)이 고향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우리 각자의 존재가 고향이라는 공간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렇듯 고향의 의미를 다르게 일깨운다. 막상 고향 안에서 살아가노라면, 눈 들어 고향을 새롭게 보기가 어렵다. 고향을 어떤 숭고한 가치로 내면화할 마음을 갖기도 어렵다. 일상 안에 고향이 너무도 현실로 엉켜 있기 때문일까.

 

얼마 전 나의 50년 학창 친구 엄기형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감문면 삼성리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일생을 고향 김천에서 살았다. 선한 품성을 바탕으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자아를 견지한 친구였다. 늘 조용하면서도 안으로 순수한 열정을 지녔었다. 그는 명리(名利)에 유혹되지 않는 무명의 문사(文士)이기도 했다.

그가 메고 다니는 가방에는 낡고 두꺼운 노트로 된, 그만의 문집 <조물찬미(造物讚美)>가 있었다. 그는 이름을 내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향하여 자신을 다독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사물과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을 이렇듯 영혼의 글쓰기로 실천한 친구이다. 강영구 교장의 말에 따르면, 그의 육필 문집 <조물찬가>는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라 한다.

 

엄 선생은 교직 정년 후에는 농부의 후예를 자임하고 땅과 더불어 농사일을 하며 땀을 흘렸다. 어쩌다 내가 고향 도서관에 강연이라도 갈 때면, 그는 조용히 뒷자리에 와서, 정성껏 강연 청취를 기록하여 나에게 보여 주며,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경건을 품는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독백 같기도 한 말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경건을 보았다. 그것은 고향을 잊고 지내는 나의 속기(俗氣)를 죽비로 내려치는 듯했다. 그는 운명하기 바로 전날 밤, 어떤 단톡방에 한 줄의 문장을 올렸다. 나는 그것이 마치 비석에 새겨 놓은 그의 비명(碑銘)처럼 느껴졌다.

유언과도 같은 그의 한 마디는 이러했다.

 

“고향의 산하(山河)여,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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