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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의 발견> 우두령(牛頭嶺)을 넘으며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칼럼니스트)

뉴 포커스TV | 기사입력 2024/07/25 [02:22]

<칼럼/ 마음의 발견> 우두령(牛頭嶺)을 넘으며

박인기(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칼럼니스트)
뉴 포커스TV | 입력 : 2024/07/25 [02:22]

코로나가 돌던 그해 늦은 가을, 나는 우두령(牛頭嶺) 고개를 걸어서 넘었습니다. 혼자서 걸었습니다. 우두령은, 내 외갓집이 있는 그곳, 거창군 웅양면 산포리 마을을 갈 때 넘었던 고개입니다.

 

▲     ©박인기 교수

 우두령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과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사이에 경계를 이루는, 해발 575m의 고개입니다. 대덕산(大德山, 1,290m)에서 동쪽으로 뻗는 지맥(支脈) 중의 국사봉(國士峰, 875m)과 수도산(修道山, 1,317m) 사이에, 움푹 내려앉은 곳이 우두령입니다.

내가 걷는 이 우두령 길은 지금은 차도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50년 전, 거창 넘어가는 새 도로를 적화 마을 쪽으로 내면서 사용치 않는 길입니다. 최근에는 4차선 도로가 생겨서, 낯선 차들이 산골을 무심하게 달려갑니다. 이 옛길은 더더욱 깊게 숨었습니다. 그 옛날 이 고개를 넘어 김천 우시장에 소 팔러 가던 일은 까마득한 전설이 되어 이 길에 묻혔습니다. 이 길을 넘어 외갓집 가던 내 유년의 사연도 곧 그렇게 되겠지요.

이 고개를 혼자 걸어서 넘겠다고 한 것은 내 유소년기에 아련한 듯 자리 잡은 외갓집 그리움을 조용히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동행하고 싶다는 내 아우의 생각도 조용히 물렸습니다. 그 시절, 그곳의 그 연고들을 내 가슴 안 그리움의 뜨락에 조용히 불러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다 보면, 왠지 눈물이 비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냥 혼자 그 눈물 안에 잦아들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지난 한 세기 가문은 침몰하여 그 영화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외가의 사연이 비감(悲感)을 더 보태겠지요.

우두령을 넘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던 외갓집이었습니다. 60년도 더 전입니다. 어머니를 따라 김천 평화동 버스 정류장에서 거창 가는 버스를 타고, 좁은 자갈길 국도로 구성, 지례, 대덕을 지나, 이 우두령을 넘었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서 웅양면 장터 가기 전, 석정 마을에 내려서, 맑게 흐르는 냇물을 건너 언덕배기를 오르면 50호 정도의 산포(山圃) 마을에 나의 외갓집이 있었습니다. 문득 이수인 선생이 지은 노래 ‘외갓길’을 웅얼거려 봅니다.

우두령 꼭대기에서, 올라온 고향 김천 쪽 하늘을 돌아봅니다. 시원하게 트인 하늘 아래로 마을마다 유정합니다. 이번에는 거창 쪽 정면을 봅니다. 멀리 험준한 능선들이 첩첩 주름입니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돌아보는 자리도 되고, 나아갈 데를 내다보는 자리도 됩니다. 내 행로의 총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자리가 고갯마루입니다. 고갯마루는 그런 지각(知覺)에 들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는 성찰을 제공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행로에도 고갯마루는 있습니다. 마흔 고개, 오십 고개, 육십 고개 등등이 시간의 고갯마루임을 보여 줍니다. 그 고개를 넘고 또 넘어, 어딘가 끝닿는 자락으로 우리 인생이 흘러가겠지요. 그러니 어찌 고개를 그냥 무심히 넘겠습니까. 이런 고개에서는 평범한 이나 비범한 이나 생 앞에 잠시 외경(畏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외가가 있던 웅양 쪽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가세 기울어진 집의 후예가 된 내 이모들이 떠오릅니다. 이곳 중학교 건물 지나며 이 학교 졸업을 최종 학력으로 지니고 평생 어려운 삶을 사신 막내 이모를 떠올립니다. 어릴 때 외가를 가면 무한정 사랑을 주셨던 그 이모들입니다. 여리고 선하셨던 외할머니가 그 많던 빨래를 다듬질하던 곳, 대청마루는 지금은 없습니다. 구천 먼 곳에서 어떤 윤회의 길 위에 있을까요.

밤마실 가실 때 나를 업고 가셔서, 할머니들 모인 마실 자리에서 나더러 고본 춘향전 읽게 하시고, 총기 있다고 자랑해 주시던 외할머니, 별 총총하던 하늘 보며 집으로 돌아올 때도, 어두운 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날 업고 오시던 외할머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산포(山圃) 마을 입구에 듭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드나들던 자취는 그대로입니다. ㅁ자형으로 된 큰 기와집이었는데, 이후 안채는 사라지고 사랑채, 본채만으로도 위엄이 있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수상하고도 낯선 건물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외갓집 있었던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안길을 두리번거리니 개들 요란히 짖고, 젊은 주인장은 경계의 빛이 완연합니다. 이곳을 찾게 된 사정을 말해보지만, 다 내 마음 같을 리가 없습니다.

표나게 사랑을 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정겹던 이모들, 설을 쇠고 외가에 가서 대보름 명절에 만나 즐겁게 놀았던 외사촌 형제들…. 외가는 불운 겹치는 세월 속에 영락하였습니다. 어른들 떠나고, 후손들 불운의 세파에 밀리면서, 서로 다가가 다독거릴 틈도 없이 멀리 흘러 흩어졌습니다. 그 무상 무정의 세월 가운데는 나도 끼어 있습니다. 이 무상함에 나는 혼자 걸으며 여러 번 울컥해집니다. 아우랑 함께 왔더라면 이 '눈물의 자유'도 없었을 겁니다.

산포, 외가 마을을 외지 나그네처럼 돌아 나옵니다. 웅양면사무소 소재지로 다시 걸어가서, 김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한 달을 외가에 있었는데, 외할아버지는 내게 매일 오전에 면사무소에 가서 신문을 찾아오게 합니다. 허허벌판 추운 길이었습니다. 왕복 3㎞, 냇가 둑길을 따라 신문 심부름 다녀오던 생각이 납니다. 신문을 찾아오면 할아버지는 신문에 연재되는 박종화 선생의 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내게 낭독하라고 하시고, 눈을 감고 듣습니다. 그런 추억을 살리며 바로 그 길 산포에서 웅양면사무소까지를 걸었습니다. 냇물과 나란히 가는 길을 따라서 걷습니다. 억새꽃이 유난 투명하게 하늘거립니다. 먼 산 가을 하늘 아래로 내가 넘어 온 우두령이 보입니다.

추억이란 미래가 아닌, 지나간 옛날을 헤집어 본다는 점에서 퇴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억이 따뜻한 눈물 고이게 한다면, 그건 생에 대한 감사에 다가갔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근원을 알 수 없는 위로와 은혜를 알 듯 모를 듯 깨닫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웅양면사무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해도 설핏 기울었습니다. 거창에서 오는 버스는 여기서 나를 태우고 김천으로 갈 것입니다. 72년 전 어머니가 시집가던 길, 바로 그 행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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