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8년의 일이다. 그해 여름 나는 삼도봉(三道峰)을 올랐다. 경상, 충청, 전라, 이 삼도(三道)를 발아래로 거느린 산은 호쾌하였다. 녹음의 능선들이 너그럽게 일렁거렸다. 우리 일행은 그날 밤 삼도봉 아래 해인 산장에서 머물렀다. 보름 가까운 달이 산록과 계곡을 어루만지듯 비쳐 내렸다. 삼라만상이 이 달빛 아래 속마음을 고해하듯 엄전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달빛 아래 놓인 사물들은 묵언수행(黙言修行)에 들어 있는 듯했다. 속기(俗氣)를 씻어낸 나의 마음도 그렇게 기울어 갔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소년이었다. 나는 산으로 둘러싸인 어떤 마을을 헤매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그 마을을 산 위에서 내려다보고도 있었다. 마을은 산자락이 얌전하게 내려와 꼬리를 드리운 곳에 있었다. 꿈속에서도 마을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마을 앞으로는 키 큰 호두나무들로 덮인 유촌초등학교가 있었다.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도 나부꼈다.
내 할아버지는 그 산골 학교의 교장 선생이었다. 학교 앞을 끼고 도는 냇물에서는 할머니가 흰 빨래를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해 떨어지는 서산 봉우리를 보면 석유 남포(램프)의 유리 덮개를 닦고 계셨다. 꿈속에서도 나는 신기한 듯 환호했다. 학교는 옆으로도 뒤로도 높은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산새들이 울었다. 오래된 목조의 학교 건물, 교실 어디에선가 낡은 풍금 소리가 들려 왔다. 호두 열매들이 따가운 태양 볕 아래서 빠르게 익어갔다.
나는 꿈을 깨었다. 꿈속의 시간과 공간은 늘 어렴풋한 것이지만, 그곳은 어릴 때 내가 살았던 유촌(柳村) 마을이었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에는 참나무 소나무가 키를 다투었지만, 마을 앞 개천으로는 버드나무가 유난 많았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유촌(柳村)’이었다. 아이들은 ‘버드내’ 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곳 산장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번에 삼도봉을 오면서 나는 유촌 마을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내 유년의 뜨락이다. 도시에서 일상의 삶이 팍팍해지면 이곳 유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식과 위안을 느끼던 곳, 바로 그곳이다. 이번에 꼭 가 보아야지. 몇십 년 만에 찾아가는 유촌 마을이다.
2. 아침에 해인 산장에서 김천으로 나오는 길에 나는 유촌(柳村) 마을로 향하였다. 차를 몰아서 가는 길이 예전 같지 않게 황량하다. 길이 좁아도, 꼬불꼬불해도, 울퉁불퉁해도, 무언가 사람이 살아가는 윤기 같은 것이 어려 있던 길인데, 오늘 유촌 가는 길은 무너진 길을 겨우 헤아려서 가는 길 같다. 산촌 길의 황폐함이 이렇단 말인가. 수몰 예정으로 다 떠나간 곳임을 나는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유촌 마을을 갔다.
그러나 내 눈앞에 다가온 유촌 마을은 충격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였다. 마을은 고즈넉하게 허물어 내려앉고 있었다. 골목과 텃밭들에는 키 큰 대궁이 잡초들과 잡목들이 무성히 자라서, 마을의 집들은 그 잡초 잡목들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학교 건물도 술 취한 노숙자처럼 비스듬히 주저앉아서 소리 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경위를 모르고 유촌에 온 것이다.
이곳에 ‘부항 댐’이 만들어지고 이제 물을 가두기 시작하면 이곳은 수몰되는 지역이라 했다. 유촌 사람들은 이미 몇 해 전에 당국의 보상을 받고 이곳을 떠난 지 오래라고 했다. 나는 댐을 만들면 마을이 수몰된다는 것을 그냥 관념으로만 이해했다. 그러했기에 나는 이런 정경의 유촌을 본다는 것을 상상조차도 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떠난 마을, 집들은 무성히 자란 풀과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유촌을 모르는 나의 일행들은 여기 뭐 볼 게 있느냐 하면서 빨리 떠날 것을 재촉한다. 그러나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교장 사택 옆의 큰 우물이 있던 자리에도 적멸이 감돌았다. 우물을 둘러싸고 있던 커다란 호두나무들은 옛날 풍경의 흔적을 간신히 증언하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나의 애틋한 기억이 마중 나가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촌초등학교 운동장은 아주 자연스러운 초원이 되어 있었다. 미끄럼틀이 있던 곳, 그네가 있던 곳, 운동화가 열리던 날 나부끼던 만국기를 묶어 두던 국기 게양대, 그 모두가 자연스럽게 적멸(寂滅)의 프로세스로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여름 달밤, 이 운동장에서, 술래잡기를 하면서 내 소년기의 이성애(異性愛)를 불러일으키던 그 소녀마저도 저 적멸의 시간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나의 유년 자체가 수면 밑으로 무너져 실종되는 것 같았다.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개천은 아직은 물길을 어렴풋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여기에 물을 가두어 큰물이 모이면, 이 시내의 물길은 흔적조차도 사라져, 기억 밖으로 증발하리라. 이제 나는 그 어디에 의탁하여, 내가 이곳에서 내 몸의 감관(感官)으로 익혔던 나의 소년기 성장의 정서적 정체를 찾아가야 할까?
나는 다시 서울의 집으로 돌아왔다. 달빛 요요한 마루에 불을 끄고 누웠다. 나는 유촌의 모든 것을 반추(反芻)했다. 나는 내가 보고 온 유촌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유촌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적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이미 물에 잠긴 것처럼, 어떤 소리도 어떤 기척도 없는 유촌이었다.
근원도 알 수 없는 울음이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울컥하는 충동적 감정에서 나온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소리 없이 고여 흘러내리는, 그런 눈물이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기억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글쓴이 주 : 부항 댐이 만들어지고 물을 가두기 시작하던 무렵, 아직 수몰되지 않은 유촌 마을의 자취가 온전하던 때인 2008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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